작성일 : 10-09-15 09:52
차 한 잔 - 정목일 경남문학관장
 글쓴이 : 홍보팀
조회 : 4,997  

차 한 잔

 

-鄭木日

 

차 한 잔 속엔 평범 속의 오묘함이 있다

그리운 이여, 매화가 피면, 국화가 피면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촛불을 켜놓고 마주 앉아 차 한 잔을 나누는 것만으로 얼마나 좋은가.

찻물은 심심산곡의 샘물을 받아와 쓴다. 첩첩산중의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맑은 물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산의 마음에 고여 있었다. 산의 만년 명상과 만 가지 풀, 나무들의 뿌리를 거쳐, 맑고 깊어진 데다가 온갖 약초내음이 섞여 투명해졌다. 한 잔의 물에 산의 마음이 가라앉아 담담해졌지만 심오하기 그지없어 사량(思量)하기조차 힘든다.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해 봄에 하동 쌍계사에 가서 우전차(雨前茶)를 사왔다. 우전차는 곡우(穀雨) 전후 따온 녹차잎으로 만든다. 우전차엔 겨울의 긴 침묵을 견뎌낸 산의 입김이 서려 있다. 어둠과 죽음을 건너온 생명의 신비가 있다. 이 세상에 새움보다 더 보드랍고 눈부신 색깔은 없다. 탄생의 빛깔이요 신(神)이 낸 색채이기 때문이다.

 

차 그릇으론 막사발을 쓰고 싶다. 잘 만들겠다는 의식없이 남에게 보여주겠다는 마음도 없이 무의식 무형식으로, 무상무념으로 빚어놓은 막사발이 좋을 듯하다. 차그릇은 산의 침묵, 하늘과 땅의 말들이 숨을 쉬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므로 텅 비어있는 것이 좋다. 마음 속까지 비워져야만 깊어 질대로 깊어져 산의 마음이 자리잡을 수 있다. 잔을 잡았을 때, 온화하고 그윽하여 저절로 마음에 가닿아야 한다. 찻잔도 한순간에 마음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만지는 동안 심오한 생각이 찻잔에 닿아, 어느새 정감과 사색의 이끼가 끼여야 오묘해진다.

 

차를 잘 다려 내려면 정성이 깃들어야 한다. 아,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디 가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복숭아꽃이 핀 것을 보고, 설산에 핀 풀꽃들을 바라보며 깨달은 이들이여 무심코 추녀 끝에서 낙숫물이 떨어지자 섬돌 앞의 땅이 젖는 것을 보고서, 찻잎을 따면서, 깨달은 이들이여. 그 마음 속에는 무심의 차 한 잔이놓여있었던 것일까. 멀리서 영원하고 심오한 것을 보려다 눈이 먼 이들이여. 깨달음은 내 주변에 늘려있는 데도 마음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차를 우려낸 다음, 침향(沈香)을 꺼내 손으로 부벼 향긋한 냄새를 적셔 권해드리고 싶다. 침향은 향나무가 천년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나온 것으로서, 세월이 지날수록 향기가 심원(深遠)해져 간다. 차향에 침향의 천년 향기를 보태 맡으며, 차를 맛보고 싶다. 차 한 잔에 잠긴 천년의 향기를 코 끝에 대보며 천년의 세월을 호홉해 보고 싶다.

차 한 잔을 드는 것처럼 손쉽고 간단한 일도 없다. 하지만, 한량없이 신묘하여 막막해질 때가 있다. 차 한 잔을 드는 것은 산의 만년 명상과 마주앉는 것, 영원의 하늘과 이마를 맞대어 보는 일일 수도 있다

 

어떻게 차 한 잔을 잘 달여 마실 수 있을까. 만년 적막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염없이 몇만 광년의 별빛을 맞을 수 있을까.

 

달빛 속에선 모두 닿아 있다. 찰라 속에 영원이 담기고 영원은 찰라 속에 숨을 쉰다. 별자리가 움직이고 계절이 바뀌고 물은 흐른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영원을 호홉해 본다. 찰라 속에 영원을 버리는 것이 영원을 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운 이여, 매화가 피거든, 난초꽃이 피거든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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