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09-15 10:07
아버지와 아들 - 이보규 소장님
 글쓴이 : 홍보팀
조회 : 4,645  

아버지의 아들 

청암 이보규

 

어버이날이 지나가고 보니 문득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난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진학 못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무능한 아버지가 미웠다. 아들만 여섯 형제를 낳고 키우면서 상급학교로 진학 못하는 아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다른 대책을 강구 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농토는 이미 거의 다 팔아버렸고 그렇다고 다른 수입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굶어 죽지 않고 먹고사는 것만으로 가족에게 당당하신 아버지였다. 그 당시는 중학교에 진학 못 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초등학교조차도 다니지 못한 아이들도 많았으며 어른까지도 문맹자가 많이 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소리치시고, 화내셨다. 집에서 평소 말씀이 없으시지만, 가족들과 대화는 언제나 아버지의 일방통행이었다. 야단맞을 때 말대꾸하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변명하면 바로 불호령이 두려워서 될 수 있는 대로 아버지 근처에 접근하지 않고 집에 들어오시면 밖으로 나가고 방으로 들어오시면 먼저 피해 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니면 대문 밖에 쫓겨나서 지나가는 이웃사람의 놀림감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이장(里長)으로 28년간 봉사하셨다.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일에 전념하셨다. 마을 사람들의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도 지어주고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해 주셨다. 늘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면사무소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것이 일과였다. 시골에서 소위 감투를 많이 쓰고 계셨다. 초등학교 육성회장 산림조합장 등 모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었다. 또한, 양곡과 비료를 보관하는 창고를 관리하면서 분주하시던 분이 당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농촌에서 사셨지만, 지게를 지신 모습은 보지 못했고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다니시는 때가 잦았다.

 

붓글씨를 잘 쓰셨고 노래를 잘하신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들을 기회가 쉽지 않고 기분이 좋은 날은 혼자서 콧노래로 "선창"과 "찔래 꽃" 노래를 자주 불러서 그 노래는 아버지의 콧노래를 듣고 배웠다. 집안 어른의 칠순 잔칫날 아버지 노래를 처음이자 마지막 들었다, 연세는 높으셨지만, 노래를 참 잘하셨다. 정말 돈에 대해서 욕심이 없으셨고 소득 없는 다른 사람의 일을 더 많이 즐기시고 평생을 사셨다.

 

형님들은 일찍 공군과 해군에 지원 입대하였고 공부는 모두 본인의 노력으로 고학력을 달성하고 처세했다. 다만, 동생들은 형이 도와서 중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후 대학진학은 모든 것은 각자 알아서 다녀야 했다. 그렇지만, 6형제는 모두 지금까지 모두 가정을 이루고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 나는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고등학교와 직장과 대학과 결혼까지도 나의 몫이었다. 돈을 벌어서 먹고살면서 신문배달로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다.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공무원시험을 보아 공직자로 생활하면서 늦게 야간대학과 대학원에 다녔다.

 

다른 친구들의 돈을 많이 버는 아버지, 도시에 살며 소위 출세한 아버지, 멋지게 생겨 닮은 아들 가진 아버지, 학비 주고 좋은 옷 사서 입히고 공부하라는 아버지가 무척 부러웠다. 나도 아버지가 학비 내어주고 공부하는 일만 시켰으면 좋은 학교 갈 수 있었고 더 출세하였을 것이라고 부질없는 생각 하며 살았다.

 

공부해야 할 시기에 고학으로 고생하며 시간을 보내서 공부에 전념해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농사일은 안 해 본 일이 없고 한때는 대형약국에서 심부름하며 자전거로 시내를 돌며 약품배달도 해 보았다. 어느 친구가 좋은 대학출신이라고 은연중에 출신학교를 들추어 뽐내면 너는 너의 아버지 덕이라고 웃어넘겼다. 나는 자식을 많이 낳아 놓고 무책임하게 공부도 시키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가 싫었다.

 

그런데 군에 가서 어느 날 자동차가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나를 보고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생명에 대한 신의 보호가 살아있는 아버지의 역할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접어두고 나의 삶과 전생애(全生涯)를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 형제를 낳아놓고 고생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의도가 아님을 알았다. 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효도라기보다는 내가 번 돈 조금씩 나누어 드린다는 생각으로 매달 시골에 계신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며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꼬박 용돈을 받으시면 꼭 편지로 답장을 보내 주셨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형들과 동생들을 의식하지 않고 또 연관시키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오직 하나라고 생각했다.

 

주고받은 편지를 파일로 만들었다. 내가 보낸 편지의 사본과 돈 보낸 소액환송금영수증과 아버지께서 보내온 편지 회신을 차례로 모아서 공문서처럼 철해 두터워져 갔다. 나중에 내가 늙어서 아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면 아들들도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 아쉬운 일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행기를 태워 드리고 싶었다. 서울에 사는 고향마을 사람들과 오랫동안 곗돈을 모아 이제 제주도 비행기 여행을 떠나려고 서울로 오시기로 한 날이었다. 불행하게도 하필 이날 어머니가 뜰에서 넘어지셔서 걸을 수 없어 급히 서울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제주도 여행도, 다시 고향으로 가시지도 못하시고 서울에서 3년간 누워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중풍으로 진단되어 끝내 고치지 못하고 퇴원하여 집에서 누워서 대소변을 보시는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은 3년 동안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묵묵히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것은 셋째 며느리로서 힘든 일을 자청하여서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목욕시키는 등 혼자서 너무 힘들 때는 형님과 아우의 집에서 번 가라서 모셔가기도 했다.

 

아버지를 그 후에도 비행기로 제주도 여행을 끝내 보내 드리지 못했다. 그 무렵에 아버지께서는 시골과 서울을 오가며 그래도 80대 노인이지만 건강하신 편이었다. 그 후부터 용돈을 우편으로 보내고 편지를 쓰는 그 일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시골 동생 집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다시 모셔왔다. 돌아가실 때까지 진행되는 노환의 과정은 버티기 어려웠다. 치매가 와서부터 을지로 파출소에서 보호하는 것을 모셔오기도 하고 주머니에 아들들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지고 다녀도 집을 못 찾기 일쑤였다. 집에서 돈을 손자가 훔쳐 갔다고 고함을 치기도 하고 활달하시던 옛모습은 이미 볼 수가 없었다.

 

동내 대중목욕탕에 모시고 가면 아이들처럼 뜨겁다고 뒷걸음치며 욕탕에 안 들어가려고 버티시던 모습도 이제는 그리움이다. 그 울퉁불퉁하시던 근육 어디 가고 앙상해진 다리로 걸음이 힘들어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 나중에는 걷지도 못해 대소변 누워서 보시면서 치매는 더 심해지셨다. 그 과정에서 시아버지를 모시는 아내는 천사였다. 시아버지의 기저귀를 바꾸어 채워 드리고 목욕시키는 모습은 시아버지의 권위도 며느리의 수줍음도 다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공간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시는 아버지를 아산병원에서 나는 가슴에 앉고서 운명을 지켜보았다. 1913년 농사꾼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그 집에서만 평생 사시다가 온갖 풍상 다 겪으며 여섯 형제를 낳아서 길으셨다. 어느 아들 하나 제대로 효도하지 못해 호강 한번 받지 못하고 살다 가신 아버지……. 86세의 일생 마지막 4년을 아내 없는 외로운 시간을 며느리에게 기대어 그렇게 생애를 마감하셨다. 나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는 늘 웃으며 살고

이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효도 그때 하겠다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그것은 부질없는 넋두리였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던 시절이기에 돈이 없어 자식 공부는 모두 시키지 못해 고학해야 했지만,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깨달은 것은 때늦은 뒤였다.

 

나는 아버지 등에 한 번도 업혀보지 못하고 가슴에 안겨보지도 못하고 자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남자가 자기 자식을 업고 다니면 부끄럽게 생각하던 때였다. 그것은 자식을 겉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아버지의 철학이고 신념이셨다.

 

자식들에게 독립심과 생존의 가치와 봉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아버지 무형의 유산이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직접 모신 4년 동안은 아버지가 아주 좋았다. 아버지는 늘 내가 좋아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셨다. 아내가 해주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유독 좋아하셨다. 술과 담배를 평생 멀리 하셨다. 몸에 좋지 않다고 해서 커피도 스스로 잡수시지 않았다. 보약 한 번 잡수시지 않았고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으셨다. 그렇게 사시다가 천국으로 먼저 떠나셨다. 내가 손잡고 교회 갈 때 제일 좋아하셨다. 다른 사람이 알아보고 인사하면 아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 쓰시던 방이 이제 나의 서재가 되어 이 글을 쓴다. 아버지의 유품은 벽에 걸린 영정사진과 주민등록증과 도장 하나뿐이다. 86세의 생애를 고생만 하시며 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커다란 영정사진을 바라보면서 어버이날이라고 걸려온 아들의 전화를 받고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어느덧 이제 내 자식들이 불혹(不惑)의 나이로 철 들어가는 동안에 나는 70세를 바라보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어버이날이 다가왔다고 아들 내외가 선물꾸러미와 카네이션꽃을 들고 와서 온 가족이 큰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서로 먼저 밥값을 내겠다는 나서는 두 아들의 모습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가족이 모여 외식을 하려면 여섯 명의 의견을 모아 메뉴 정하기 쉽지 않은데 오늘 메뉴는 내가 정한다고 큰소리쳐도 평소와 다르게 이날은 아무도 이의가 없다. 큰아들 내외도 “아버지 잡수시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오리고기를 먹자고 해도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던 신세대 두 며느리도 아무 소리 않고 따라오는 것을 보고 옛날 아버지께서 아무 때나 남을 배려하지 않고 큰소리치시던 모습으로 내가 변해 가고 있었다.

 

서재에 들어와서 슬며시 내미는 아들의 봉투를 받았다. 내가 지난날 아버지에게 용돈 드리며 편지 써서 보내던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무능한 아버지를 원망하던 나. 이제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되돌아보니 남들처럼 과외 시켜 일류대학 못 보내고 외국유학은 아니더라도 외국 어학연수 한번 못 시키고 결혼 후에 아파트 한 채 사서 살림 내주지 못하고 분가시킨 것이 부끄럽다. 이제 자식들이 평생 공직자로서 가난하게 살아온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역시 아이들 처지에서 보면 나도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버지는 결코 못 되는 것 같다. 이제 내가 못난 또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비굴하게 살지 않는 것, 자신의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것,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자립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 모두 아버지가 주신 유산이다. 건강한 육체를 주셔서 오늘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 머리와 지혜를 주셨고 목소리를 주셔서 강의할 때 힘들지 않고 수강하는 사람들 모두 편하게 듣도록 한 것, 유머감각도 모두 아버지의 유산이다. 아버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 세상에 내가 태여 낳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동안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지금 아버지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웁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큰소리치던 그 모습이 지금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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