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9-30 10:48
그림이 있는 에세이 - 소녀상 - 임종렬 갤러리숲 대표
 글쓴이 : 홍보팀
조회 : 5,107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리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감성이 충만되어 있어야 작품 제작이 흥미롭게 진행되고 완성도가 높아진다. 그럴수록 그림을 작업하는 과정의 작가 심리 상태가 깊게 작용하면서 작품 속에 반영되는 것이다. 내가 서울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작가들이 뽑은 최우수상’을 수상한 <소녀상>이 그러한 체험이 농익게 배어든 작품이다.

그 소녀상을 제작하기 전에, 우연히 그리스의 감독 테오 앙겔로폴로스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을 보았다. 영화의 화면은 지극히 어두웠고, 화면속 어두움만큼이나 화려한 장면 한 곳 보여지지 않으면서, 지루하리만치 단조로운 흐름으로 이어졌다. 바닷가 역시, 일반적인 상식의 아름다운 풍경과는 거리가 먼, 가슴을 에이는 듯한 을씨년스러운 적막감이 흐르고 있을 정도이니까. 세속에 물든 마음을 정화 시키려는 듯, 서정적인 엘레니 카라얀느의 음악은 가슴으로 파도처럼 아련히 밀려드는데...

영화의 도입부에서, 어린 남매는 밤의 기차역 속으로 몰래 잠입 해 갔다가 결국은 끌려 나오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열 살 남짓한 사생아인 어린 소녀는 늘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허상의 아버지를 찾아 독일이라는 머나먼 나라로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은 서구에서 갈구하는 절대적인 신으로도 볼 수 있겠고, 삶에 대한 희망 또는 실존적인 아버지일 수도 있겠으리라. 나는 어린 남매가 아버지를 찾아 가는 고난의 길을 함께 따라가며, 숨을 죽이면서 영화 속으로 몰입 해 들어갔다.

처절하게 아버지를 찾아 헤메는 남매의 강인한 의지 속에서, 절망한 누나는 기어이 “이제 그만 포기 하자”고 말하게 된다. 어리디 어린 동생이 “누나가 나의 희망을 꺾을 자격이 있어?”라고 당차게 반박하는 장면은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 낀 국경의 화면은 압도적이었다. 갑자기 정지된 듯한 백색 화면

수면의 물결을 가르며, 노를 젓는 “찰~싹”...“찰~싹”...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데.

그 화면 속에서 관객을 전율하게 하는, 가슴을 파고드는 두 발의 총성. 땅!... 땅!... 그리고는 숨이 멎을 듯한 너무나도 기나긴 정적. 여전히 정지된 화면.

안개는 더욱 짙어져 가며 공포심은 가중되어 가는데, 아무런 소리도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하이얀 스크린 위에 인식하기 힘겨울 만큼 서서히, 아주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동그랗고 작디 작은 나무 한 그루! 안개 속의 풍경!

그렇게도 가슴 아린 그 영화를 감상한 후에, 나는 사흘 동안 말을 잃어 가면서 깊은 수렁으로 침잠되어 가고 있었다. 그 우울함 속에서 화실 수업을 하던 날의 오후였다.

영화 주인공 또래의 어린 제자가 흰 모자를 예쁘게 쓰고서 홍조 띈 얼굴로 들어 왔다. 한쪽 어깨에는 장난스럽게 가방을 걸치고. 엄마가 만들어 주신 어깨가 가느다란 끈으로 된, 분홍색 티셔츠의 끈을 다른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채로 나비처럼 나폴거리며 화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선생님, 빨리 그림 그리고 싶어서 뛰어 왔어요.”라며 쌩긋 웃으면서. 그 소녀의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바로 이젤 앞에 앉혀 놓고서 스케치를 하였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의 가벼운 흥분과 함께.

그렇다면 자신이 작업하고 싶은 만큼 밝다고 느꼈던 소녀의 모습은 과연 바르게 인식 되었던 것일까. 영화를 감상하고서 깊은 우울감에 잠겨 있던 사람의 눈에, 그 감정과 상반되는 모습에 작업 의욕이 나올 수 있었을까. 어쨌던 작업에 대한 감성은 충분히 고조되어 있었기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연필을 쉽게 잡은 것이다.

수채화로 인물을 그릴 때에는 밑그림을 철저히 준비하여 화면에 옮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의 해맑은 모습을 놓치기 전에, 곧 바로 배접하여 놓은 수채화 캔버스의 팽팽한 종이 위에 재빠르게 속필로 스케치를 마쳤다.

기본 채색을 하려고 소녀의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방금 보았던 그 맑은 웃음이 사라져 버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감을 처음 계획과는 반대로 핑크톤에서 아주 어둡고 채도가 낮은 보라색조로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모노톤의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화면을 물로 충분히 적신 종이 위에 평필로 신속히 미끄러지듯이 피부색과 배경까지 함께 어둡게 덮어 나아갔다.

수채화 종이의 요철 부분에 침전되고 떠오르기도 하는, 물감 색상 입자들 고유의 특질을 살려 낼 수 있도록 질감을 유도하였다. 유동성을 극대화 시키려고 물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하여 캔버스 전체를 두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일렁이게 하였다. 하얀 모자와 손에 들고 있는 몇 송이의 작은 들꽃들도 흰 부분만을 칠하지 않고 남겨 놓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어두운 보라와 대비를 이루어 화면에 생동감을 주면서 반짝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화면을 말려 가면서 침착하게 완성을 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내가 아이에게서 웃음을 빼앗고 슬픈 얼굴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 간 후, 작업하기 전에 느꼈던 상기된 모습으로 표현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보았다. 그러나 미안함과는 다르게 내가 작품에 대하여 지극히 만족해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작업 전 후의 분위기가 반대되는 그림으로 완성이 되었지만.

가끔씩 소녀가 나에게 “미국으로 유학 가신 아빠가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얼굴에서 스쳐 지나갔던, 알 수 없는 그늘을 나 자신도 모르게 화면에 그대로 포착하였다는 성취감으로 기뻤으니까.

그런 순간 소녀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면서 “아! 어쩌면 이럴 수가” 하며 긴 한숨을 쉬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제가 선생님께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저 대신 저의 딸을 부탁드립니다”라며 화실로 찾아와 행복해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의 어느 날, 딸이 모델을 섰다고 기뻐하는, 그 그림을 보고 싶다고 제자의 어머니께서 오셨다. 미소짓는 그 분께 그림을 보여 드리며, “어린 소녀를 슬픈 모습으로 그려서 대단히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아이의 엄마는 혈색이 창백해지면서 “선생님, 미안해 하지 마세요. 훌륭한 작품을 제작 하셨는데요..”라고 말하지 않는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기어이 의아해 하는 나의 품으로 쓰러져 안기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어린 딸에게는 도저히 알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딸은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라면서 남편의 참혹했던 불의의 사고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던 딸과, 영원을 함께 해야 할 아름다운 아내의 곁에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머나 먼 길로 영원히 떠나 간, 다정했던 아이 아빠의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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